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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책

건축 멜랑콜리아 - 이세영

  • 2017년 5~6월 읽다.

  • 서산부인과의원 / 김중업
    #곡선 #안토니가우디 #형태주의 #미셸푸코_생명현상의국유화 #르코르뷔지에

    - "직선은 인간에게 속하고 곡선은 신하게 손한다" 이 단순 명료한 진술은 스페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것이다. 신이 빚어낸 본래의 자연은 변화무쌍한 비유클리리드의 세계다. 그러니 '두 점을 잇는 최단 거리의 선' 따위의 수학적 정의는 그 안에서 어떤 물성도 갖지 못한다. 관념 속에나 존재하던 기하학의 추상 세계가 견고한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생종관 정복을 향한 인간의 집요한 분투 덕분이다. 깎고 세우고 파고 다지는 인고의 노동 끝에 인간이 이룩한 근대도시는 말 그대로 유클리드의 공리 위에 축조된 또 하나의 자연이었다. 중신과 주변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방사형 도로, 중력을 거슬러 융기한 철골 마천루, 기계 문명의 집적물인 대공장과 끊임없이 누군가의 업적을 과시하고 찬양하는 거대기념비들.
    가우디의 형태주의 건축은 이 같은 유클리드 세계와의 단절 위에 일궈낸 빛나는 예언자의 성취물이었다. 그의 조형 언어는 직각의 좌표 체계에 포획되지 않는 비정형의 곡선을 핵심 원리로 삼았다. 엄격한 기하학적 형태미에 집착했던 19세기 신고전주의와의 절연이자, 막 움트기 시작한 기능주의 건축의 직선 숭배에 대한 결연한 거부였다. 가우디의 선은 자연의 것이었고, 그의 말대로 신의 것이기도 했다.
    20세기 중반,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간 극동의 변방 국가에 전후 주류 건축에 반기를 든 당돌한 건축가가 돌출한다. 당대의 거장 르코르뷔지에 문하에서 유럽 건축의 첨단 문법을 익히고 돌아온 김중업이었다. 1956년 서울 명보극장과 부산대 본관 설계로 궤도에 오른 귀환자의 이력은 서강대 본관(1958), 주한프랑스대사관(1962), 유엔묘지 채플(부산, 1963)을 거쳐 1965년 또 한 차례 가팔른 도약을 성취한다. 서울 신당동에 있는 '서산부인과의원'이다. (11~12쪽)

    - 그러나 이 전위적인 건축물의 남다른 무게는 그 안에 물질화된 건축가의 조형 의지가 협량한 기능인의 순응주의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서산부인과의원은 이상 사회를 향한 예술가적 충동과 사회적 존재로서 건축가의 책무를 방기하지 않으려는 모더니스트의 조형 의지가 비루하고 폭력적인 당대 현실과 대치하며 빚어낸 격투의 흔적이다.
    김중업이 서산부인과의원 설계에 착수한 1960년대 초는 '정치 산술' 성격의 인구 담론이 빠르게 확산되고, 국내에서 처음 산아제한에 중점을 둔 '가족계획'이 국가 시책으로 도입된 시기였따. 가족계획은 성교와 임신, 출산 같은 개인의 생식 활동에 국가권력을 삼투시키는 통치 테크놀로지라는 점에서, 미셸 푸코가 근대 생명관리권력의 특징으로 꼽은 '생명 현상의 국유화'가 본격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했다. 목적은 명확했다. 한 사회가 보유한 '생식력의 총체'인 인구 규모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함으로써 경제적 생산의 능력치를 최대화할 것. (16쪽)

    - 서산부인과의원에선 일찍이 병원 건축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파격이 실험된다. 이 건조물의 조형 전략을 지배한 것은 용도보다는 형태, 보이는 입면보다는 감춰진 평면, 서사의 직접성보다는 상징의 비옥함이었다.
    이 완강한 형태주의자는 그럼에도 건축물의 주된 이용자가 될 임산부와 영아의 처지에 눈감지 않았다. 김중업에게 산부인과라는 공간은 생식력의 통제와 조절에 동원되는 차가운 기계장치가 아니라, 존재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을 녹여낸 원형질적 공간, 약동하는 생명을 품어 안을 따뜻한 모성의 공간이어야 했다. 이 같은 조형 의지를 자궁과 태아를 형상화한 타원 격실, 완만하게 물결치는 병실 복도, 부드러운 곡면으로 내부를 감싼 콘크리트 외벽의 견고함 속에 건축가는 풀어냈다. (20쪽)

  • 당인리발전소
    #미래주의 #필리포마리네티_미래파

    - 전기는 유용성에서 모든 에너지원을 압도했다. ... 말 그대로 그것은 생산력의 중핵이자 전능의 에너지요, 현대성(모더니티)의 총아였다. 오죽하면 사회주의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조차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더하기 전기"라는 유시까지 남겼겠는가. 전기와 더불어 꽃핀 현대성은 20세기의 문턱을 넘어서며 한층 가파른 질주를 감행하는데, 그즈음 현대 기계문명의 광휘에 매료된 일군의 예술가들이 출현한다. 이탈리아 미래파다. (24쪽)

    - ... (전략) 그 태생부터 현대성은 대지를 수탈하고 공동체의 또 다른 내부를 식민지화하는 데서 동력원을 찾는 야만성의 짝패였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현대성의 이면을 일찌감치 꿰뚫어본 이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첨단의 미'를 노래했던 한 모더니스트 시인이었다. "헬리콥터여 너는 설 동물이다."(<헬리콥터>) 그는 풍선보다 가볍게 이륙하는 헬리콥터의 '자유'에서 '비애'를 읽어낼 만큼 예리한 촉수의 소유자였는데, 그가 감지한 비애는 현대성의 이상과 한국적 현실의 아득한 거리가 빚어내는 '절망'의 표현이자, 그 자유의 문명을 제 것으로 전유하기 위해 변방의 타자들이 지불해야 했던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린 "설움"(<거미>)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당인리 5호기가 준공되기 1년 전인 1968년 불의의 윤화로 세상을 떴다. 발전소가 지척인 마포 구수도엥 살다 죽은 시인의 이름은 김수영이다. (35쪽)

  • 남산 자유센터 / 김수근
    #기념비 #모더니티 #르코르뷔지에 #미스반데어로에

    - 태고의 집은 움집이었다. 한강변 선사 유적이 증언하듯, 그것은 구조물이라기보다 초목으로 변통한 새 둥지에 가까웠다. 집의 시원이 수렴하는 궁극의 형식이란 점에서 둥지가 품은 것은 뭇 새들의 몸뚱이가 아닌 '집의 이데아'였다. 오늘날 그 이데아에 충실한 주거 형태를 꼽으라면 유목민의 게르일 것이다. 게르 안에선 머묾과 떠남의 욕망이 여전히 경합한다. 견고함과 내구성을 지닌 건축물은 정주의 욕망이 이주의 충동을 제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출현했다. 정주 문명의 등장은 건축물에 '상징'이란 새 임무를 부여했는데, 이로써 건축은 주거와 수용이란 본연의 기능에 더해 시간의 침식을 견디며 문명의 찬란함과 권력의 압도성을 표상하는 매체가 되어야 했다. 그것의 최종 형식은 머묾의 욕망이 도달한 극단, 바로 '기념비'였다.
    '기계 제작자'를 자처한 현대건축(르코르뷔지에는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다.)에서도 기념비를 향한 욕망은 거세되지 않았다. 파괴와 소멸, 가차 없는 단절이 지배하는 현대성의 덧없는 공허함에 비례해 초월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 역시 부단히 팽창했던 탓이다. 시인 보들레르는 이 같은 현대성의 이중 구조를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이었다. "모더니티의 한쪽은 찰나적, 일시적, 우연적인 것이며 다른 한쪽은 영원불멸한 것이다." 현대예술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들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멸의 성분들을 포착해 가시화하는 일에 기꺼이 복무했다.
    건축가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집단이었다. "건축은 공간의 용어로 표현된 시대 의지"라는 미스 반데어로에의 정의처럼, 건축이란 행위는 시간의 일시성을 붙들어 공간 속에 고정하는 일이 다름 아니었던 까닭이다. 문제는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건축의 욕망이, 힘의 영속을 희구하는 권력의 속성과 불가원의 친화성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건축가의 조형 의지와 권력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현대의 기념비'는 탄생했다. (37~38쪽)

  • 연세대 학생회관(서울, 1968) / 김정수
    #김남주_혁명은패배로끝나고 #이한열 #강경대 #보들레르_원수

    - 그 시절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급진주의자들의 인큐베이터였다. 첨두아치에 구현됐던 신의 존엄성은 '혁명'이란 이상의 지고함으로 간단없이 대체됐다. 수평 결속된 연속 아치에 담아내려 한 인간의 상호의존성은 추상적 인간이 아닌 노동자, 농민이라는 현실 속 인간(민중)과의 연대로 구체화됐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 건축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건립 주체의 의지나 의도가 아닌, 그곳을 점유하고 이용하는 자들의 '공간적 실천'이란 사실을 건축가와 건축주는 간과했던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식으로 말하면 '공간의 의미'는 그것의 '용법'과 다름없었다. (58쪽)
    - 1980년대 이 건물을 지배하던 주된 정조는 '진정성'이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구현하려던 '신실성'은 1974년 건물 후방에 신축된 학교 예배당에 격리, 연금됐다. 라이오넬 트릴링의 정의에 따르면, 신실성은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도 진실하기를 원하는" 종교적 품행과 관련된다. 반면 진정성은 "참된 자아실현의 열정을 가로막는 사회적 힘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다.(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2009에서 재인용) (58쪽)

    - 내 청춘은 캄캄한 폭풍우에 지나지 않았구나,
    여기저기 찬연한 햇빛이야 몇 줄기 뚫고 들어왔지.
    천둥과 비바람 그리고 모질게 휘몰아쳐
    내 뜰에 빨간 열매 남은 것 별로 없다.
    ㅡ 샤를 보들레르, 원수

  • 아현고가도로(서울, 1968 착공~ 2003 철거)
    #김현옥 #미래주의 #안토니오산텔리아 #르코르뷔지에_부아쟁계획안(1925) #드로몰로지_질주학 #오스만_파리

    - 관광 엽서와 외국인용 홍보 책자에는 고가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불빛 궤적을 장시간 노출로 담아낸 야경 화보가 단골로 실렸다. 개발과 성장이 정치적 정당성의 중요한 원천이 되면서 도시 경관 자체가 국민적 동의를 조직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 결과였다. (중략) 그러나 입체의 도로망은 그 자체로 정치적 기능을 갖는 물리적 구조물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의 말처럼 현대사회에서 "정지는 죽음이며, 그것은 전 세계의 보편 법칙"(이재원 역, <속도와 정치, 2004)이 됐기 때문이다. 드로몰로지(Dromology, 질주학)라는 독창적 이론 체계에 근거해 인류사의 진화를 설명하는 비릴리오는 현대의 특징을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지배하는 것'에서 찾는다. 도시 재개발의 원조로 지목되는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역시 이런 정치적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었다. (73쪽)

    - 자본의 축적과 순환을 촉진하고, 통치의 안정과 국민적 동의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던 이 입체 구조물 역시 50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자신을 만들어낸 체제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파괴될 운명을 맞았다. 과잉 축적의 위기가 항존하는 한 잉여 자본을 해소할 대상은 주어진 물리적 공간의 경계 안에서 부단히 물색돼야 하는 탓이다. 도시라는 공간과 그 내부의 숱한 구조물이 건설과 파괴의 주기적 순환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75쪽)

  • 세운상가 / 김수근
    #김현옥 #기념비 #르코르뷔지에_위니테다비타시옹 #조지프슘페터 #창조적파괴 #파우스트 #자기파괴

    -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제성장이라는 가시적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에게 대규모 건축물은 근대화와 성장이라는 집권의 명분과 치적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세운상가는 누군가의 위엄과 업적을 상기시키려는 음험한 욕망을 자신의 기념비적 외형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 기념비성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 공간이 종로변이었다. 지금의 세운초록띠 공원이 들어서기 전, 종로변에서 바라본 세운상가는 말 그대로 평지돌출이었다. 콘크리트 구조물이 갖는 중량감은 그 위압감을 한층 배가했는데, 건물의 이런 위압성은 맞은편에 위치한 종묘라는 수평 공간과의 대비 속에서 시각적 강렬함을 획득했다.
    태양의 궤적이 지표면에 근접하는 겨울철, 오후의 세운상가는 종로의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종묘의 외대문 앞까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건축물에 담긴 수직적 조형 의지가 왕조의 공간을 압도하는 거인의 이미지로 번안되는 순간이었다. 부서지는 역광을 뚫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육중한 몸체는 단순히 극동의 한 변방 국가가 성취한 기적 같은 도약을 지시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여버리고, 성스러운 모든 것을 세속화하는 현대성의 위력 그 자체였던 것이다. (82쪽)

    - 네 개의 건물군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본다면 세운상가는 물 위에 뜬 선박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필로티(기둥)에 의해 지면으로부터 떠오르듯 지탱되는 육중한 몸체, 선박의 상층부와 갑판을 옮겨놓은 듯한 공중정원과 보행데크 주벼에 펼쳐진 '슬럼의 바다'와 공간적 대비를 통해 이 건축물에 거대한 '방주'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위험한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를 통해 '존재론적 안전'을 제공하는 방주의 기능적 표상은 의미론적 확장을 거쳐 '구원'이라는 모티프로 연결되는데, 유사한 사례를 르코르뷔지에가 프랑스 마르세유에 건설한 집합주택 '위니테 다비타시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84~85쪽)

    - 세운상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결국 '최소 면적에 최대의 임대 수익'이라는 지대 자본의 이윤 논리, 입주 상인들의 즉물적 생존 논리였다. 세운상가는 이런 점에서 한국의 모더니티가 숙명처럼 간직한 천민성과 불모성, 나아가 제3세계 도시 공간에서 진행되어온 자본에 의한 공간의 식민화를 극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91쪽)

    - 당시로선 재개발(녹지공원 재조성)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겨졌따. 계랸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없듯 창조는 파괴를, 건설은 폐허를 동반한다. 이 같은 창조와 파괴의 주기적 순환이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임을 간파한 인물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였다. 그는 현대성의 본질을 '창조적 파괴'란 이름으로 정리했다. 세운상가는 그 짧고도 강렬한 희비극적 생애를 통해 '창조적 파괴'와 그에 수반되는 '허무의 멜랑콜리'를 극적으로 변주해 보여준다. (94쪽)

    - 김현옥의 창조적 파괴를 통해 그 기초가 마련된 건축 프로젝트가 이명박이라는 또 다른 파괴자에 의해 일소될 운명에 직면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현옥의 파괴가 자본축적의 기초를 마련하고 기념비적 도시를 건설하려는 당대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었다면, 이명박의 파괴는 건설 경기를 되살려 축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고도화된 토건 국가의 요구에 복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비극과 희극으로 두 번 반복된다."던 마르크스의 통찰은 세운상가의 우념ㅇ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김현옥이 세운상가란 무대 위에 올려진 첫 번째 비극의 연출가였다면, 38년 뒤 이명박은 언젠가 무대에 올려질 두 번째 희극의 각본을 써 내려가고 있었던 셈이다. (94~95쪽)

    - 세운상가의 생애사는 한편으로 모더니티의 핵심 동력인 창조적 파괴의 이미지를 가장 극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그것은 과거의 쓰레기 더미로부터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신화와 가치, 일상적 생활 방식을 파괴해버리는 파우스트의 이미지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충동이 그를 결국 타락과 폐륜이라는 자기 파괴의 비극으로 이끌듯 '발전'과 '진보'를 위한 파괴 역시 새롭게 만들어진 사회적, 물리적 공간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폐허를 만들어냄으로써 '파괴의 장기 지속'을 낳는다. 세운상가는 '자기파괴'라는 모더니티의 숙명을 자신의 희비극적 생애와 운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반세기의 생애 주기를 통해 한국의 모던화 과정이 보여준 압축성과 돌진성을 시공간적으로 변주해 보인다.
    세운상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세운상가는 건축물에 반영된 당대의 축적체제와 국가, 자본, 시민사회의 역학 관계 등 역사적 현상태를 '온몸으로' 발언한다. 그 발언의 속기록엔 자기과시, 억압, 무책임성 등으로 특정지어지는 국가권력의 헤게모니 부재 상황, 근시안적 이윤 추구를 속성으로 하는 동시대 자본의 천민성, 관변 예술가의 좌절된 기술 이상, 시민사회의 불임성 같은 우울한 목록들로 가득하다. 세운상가는 한국 모더니티의 알레고리이자 자서전이다. (96~97쪽)

    - 파괴든 재생이든, 그것이 자기 증식이란 자본의 매한가지 욕망이 빚어내는 변화인 한, 항상 누군가의 추방을 예고한다는 사실을 서촌과 홍대앞, 경리단길, 문래동 등 서울의 신흥 상업 명소들에서 적나라하게 목도하지 않았던가. 하늘 아래 새로운 욕망이란 없다. (99쪽)

  • 성 니콜라스 성당(서울, 1968년) / 조창한
    #엘리아데 #비잔틴

    -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 성스러운 모든 것은 세속화한다. ㅡ 카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 성에 대하여 우선 내릴 수 있는 정의는 그것이 속의 역이라는 것이다. ㅡ 엘리아데, <성과 속>

  • 용산 국방부 구관(서울, 1970년) / 종합건축연구소 이호진

    - 반도의 현대사에 드리운 군부의 그늘은 짙고 깊었다. 군인 통치 30년은 한국 자본주의가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한 시기였으나, 거리와 학교와 공장과 쉼터 도처엔 치욕과 불안, 의심과 강박이 복병처럼 도사린 납빛의 나날이었다. 금지와 검열, 감시와 처벌의 공포가 욕망과 상승의 신기루와 동거하던 칼날의 시간을 견디며 20대 여자 시인은 썼다. (111쪽)

    - 그래서 볼 수 있습니다
    꽃의 웃음이 한없이 무너지는 것을
    밤의 달빛이 무섭게 식은땀 흘리는 것을
    굴뚝과 벽, 사람의 그림자 속에도
    몰래몰래 내리는 누우런 황폐의 비
    ㅡ 최승자, <편지>

    - 건축주가 요구한 것은 사무 빌딩의 기능적 편의성과 군사시설로서의 보안성, 민원 업무 처리의 용이성이었다. 경사지라는 지형 특성을 활용해 민원 시설은 아래쪽 이태원로변으로 내리고 보안이 필요한 본건물은 대로변과 이격된 언덕으로 올려 엄격한 출입 관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건축주의 주문은 기능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호진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국민을 호령하는 군부의 권위를 외형으로 표현해야 했다. 견고하고 웅장한 인상을 주는 좌우대칭의 박스형 건물을 고지대에 앉힌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라고 했다. 장방형 입방체의 사면에 수평띠 형태로 창을 두르고 최상층의 벽면을 다른 층보다 높게 처리한 것 역시 안정감과 중량감을 강조하기 위한 고려였다. (117쪽)

    - 군인들의 정부, 정치권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져 제3공화국 기간 중 군 출신의 국회의원과 각료의 충원율은 각각 16%, 29.2%에 달했다. (>> 지금은 법조인들이 이 자리를 대체***) (118쪽)

    - 물론 근대화 과정에서 군이 담당한 기능에는 긍정적 요소도 있었다. 미국의 대규모 원조 덕에 1950년대의 군은 가장 첨단화된 기술과 장비를 보유한 집단이었다. 대규모 군사 유학을 통해 미국의 정교한 행정관리 기법을 전수받은 것도 군이었다. 따라서 군부정권의 수립은 군이 갖고 있던 장비와 기술, 근대적 조직관리 기법을 사회 부문으로 이전함으로써 산업화의 초기 국면에 무시 못할 성장 동력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었다. (119쪽)

  • 국회의사당(서울, 1975년) / 김광노 등 설계위원단(김정수, 김중업, 안영배)
    #기념비 #박상훈_거리정치

    - 국회의사당이 여의도에 자리 잡은 것은 박정희의 철권통치가 한창이던 1975년이다. 대통령이 멋대로 의회를 해산하고, 말 안 듣는 국회의원들은 정보부에 데려가 초주검을 만들던 시절이다. 그런 박정희되 의사당 건물만은 여느 중앙부처 청사보다 돈과 공을 많이 들여 지어주었는데, 135억원이란 공사비는 당시 한 해 예산의 10분의 1과 맞먹는 규모였다. 자신이 망가뜨린 입법부의 권위를 거대 석조 건축물의 위엄으로 보상해주겠다는 얄팍한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125쪽)

    - 3선 개헌의 먹구름이 짙어가던 1969년 제헌절, 역대 국회의장과 3부 요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열렸다. 그러나 이날로부터 의사당 완공에 이르는 6년여 세월은 한국 의회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 착공 3개월 만안 1969년 10월, 박정희는 개헌을 강행해 '종신 대통령'을 향한 첫걸음을 뗀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40대 야당후보 김대중에게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의사당 골조 공사가 마무리된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127쪽)

    - 마침내 1975년 9월 1일 의사당이 완공됐다. 박정희와 3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등 국내외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준공식은 의회민주주의의 장례식이라 부르는 게 합당해 보였다.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 '동양 최대 의사당' 앞에서 사람들은 의회민주주의의 시신이 안치된 '거대 석실묘'를 떠올렸다. (중략) 열주 구조에 억지스런 돔까지 얹어 권위와 숭고미를 과장한 의사당은 사실상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한 통치 권력의 압도성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기념비였다. (132~133쪽)

    - 표면상 의회는 정상성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의회가 흡수하지 못한 시민들의 열정과 에너지는 주기적으로 분출됐다. 1991년 5월의 분신정국, 1997년 노동법 투쟁, 2002년 소파 개정 촛불집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대표적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거리 정치의 주기적 반복이 "민주화가 사회운동에 의해 이뤄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정치의 발견>, 2015) 진보(급진) 세력이 배제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가 고착되면서 의회와 사회적 요구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운동을 통해 정당과 의회 중심의 대의 시스템을 우회하려는 시민적 열망은 소멸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133~134쪽)

  • 소라의 성(제주, 1969년) / 김중업
    #르코르뷔지에_롱샹성당 #제주대

    - 건축가가 박정희와 불화했던 김중업이란 사실 역시 대통령 경호원 숙소설을 배척한다. 김중업은 5.16 직후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데모를 비판한 일로 곤욕을 치렀고, 유신 직전인 1971년엔 기고문에서 판자촌 빈민들의 광주대단지(지금의 경기도 성남) 이주 정책을 공개 비판했다가 주민 폭동 직후 정보 당국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강제 외유를 떠나야 했다. (138쪽)

    - 소라의 성이 지닌 독특함은 2층의 수평 창을 통해 패각의 닫힌 이미지를 교묘하게 전복시킨다는 점이다. 현대건축에서 수평 창은 경관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을 극단적으로 충족시키는 장치다. 창을 통해 이뤄지는 자연경관의 포획은 외부를 부단히 내부화, 식민화하려는 근대적 욕망과 맞닿아 있는데, 이 점은 무엇보다 수평 창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란 사실과 결부된다. 그것은 건축물의 외벽이 수직하중을 지지하는 노역에서 해방됨으로써 비로소 등장했다. 기둥과 보만으로 구조물을 지탱하는 철근콘크리트 공법이 보편화된 덕이었다.
    소라의 성 2층의 창문 앞에 서면 남방해역의 망망대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창이란 프레임을 통해 외부는 '내부에 포획된 외부'로 재탄생한다. 이때 외부는 위험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프레임에 같인 '순치된 스펙터클'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 건물에 투사된 당대의 무의식은 이윤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 부단히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자본의 욕망, 힘의 공백 지대를 향해 팽창을 거듭하는 권력의 정념과도 유사하다. (141쪽~143쪽)

  • 유진상가(서울, 1970년) / 설계자 미상

  • 여의도순복음교회 / 조행우
    #기복신앙 #김진호

    - 사람을 끌어 모은 것은 교회가 전하는 '축복에 대한 확신'이었다. 조용기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교회를 나오면 건강과 부, 영적 구원까지 얻을 수 있다는 '3박자 구원론'이다.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순복음교회의 부흥 비결을 "'오직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군부독재 시절의 담론과 제도에 호응하는 신앙 담론과 제도를 발명해 낸 것"(<시민 K, 교회를 나가다>, 2012>에서 찾는다.전후 부흥사들의 치유 메시지에, 1960년대식 "잘 살아보세" 구호를 신탁처럼 변형해 추가한 게 순복음의 신앙 담론이라는 것이다. (172쪽)

    - '영적 구원이 속세의 성공을 동반한다.'는 메시지는 현대 개신교 신앙 체계에서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신복음주의'로 불리는 1960년대 미국 보수 개신교단의 신학은 '번영'을 신앙적 ㅎ녀실관의 최상위에 두고 이를 위해 개인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구성해가는 자기 계발적 삶의 태도를 강조했다. '적극적 사고'를 신학의 중심 말로 제시한 노먼 빈센트 필을 필두로, 그의 문제의식을 현실 목회에 도입해 성공을 거둔 로버트 슐러, <목적이 이끄는 삶>(2003)이란 저서로 이름을 알린 릭 워런과 <긍정의 힘>(2005)를 쓴 조엘 오스틴 등이 '번영 신학'의 대표 주자였다.

  • 광주시민회관(광주, 1971년) / 임영배
    #김수영 #르코르뷔지에 #바우하우스_기능주의 #난입의정치학

    - 횡사한 시민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소시민'이었다. 그들은 "왕국의 음탕 대신에/ 오십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불의를 비판하고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기보다 일신의 이익이 훼손될까 전전긍긍하는 '모래보다 왜소하고 먼지보다 가벼운' 존재들이었다. (중략) 자유와 존엄을 쟁취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일전을 불사하는 각성된 정치 주체인 시민은 사실상 도시라는 행정단위의 거주민 차원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182~183쪽)

    - 말 그대로 그것은 '난입'이었다. 난입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자격이나 근거도 갖추지 않은 채 장에 뛰어드는 정치적 행동"(고병권, <추방과 탈주>, 2009)을 가리킨다. 날품팔이, 부랑아, 구두닦이, 노동자...... 애초부터 필드로 난입하지 않고선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가 박탈된 사람들이었다. 오랜 기간 그들의 목소리는 누구에 의해서도 대표되지 않았고, 국가권력엔 정치, 사회적 동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역사의 그라운드 한복판에 총을 들고 난입한 것이다. 오랜 차별과 야만적 국가폭력에 노출된 지역민들은 박수를 보냈다.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킨 것은 19년 전 반란군 탱크에 짓밟혀 비명횡사한 '시민'이라는 이름이었다.

  • 남영동 대공분실(서울, 1976년)/ 김수근
    #다이달로스 #베르톨트브레히트_어떤책읽는노동자의의문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악의평범성

    - 노동자가 지은 것이 찬란한 문명의 기념비들뿐일까. 감옥과 수용소를 짓고, 고문실과 처형대를 만든 것도 노동자였다. 그리고 그 노동의 배후에는 예외 없이 숙련된 건축가가 있었다.
    짓는다는 일이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은 이래 대부분의 건축가는 이 운명의 긴박을 벗어나지 못했다. 회화나 조각, 음악과 달리 태생적으로 돈을 지불하는 자에게 존재를 의탁하는 장르가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의뢰인은 대체로 권력자이거나 재산가였다 .신화 속 건축가 다이달로스 역시 크레타 왕 미노스로부터 일감을 얻는다. 미노스는 그에게 미노타우로스를 감금할 미궁을 짓게 하는데, 건축가의 손으로 빚어낸 첫 작품이 왕의 정적을 가둘 감옥이었다는 사실은 권력과 건축에 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193~194쪽)

    - 나치 시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는 유대인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가 지은 건축물은 그 자체로 어떤 범죄나 폭력 행위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하지만 당대의 일급 건축가로서 최고 권력자의 의뢰를 받아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은 주홍글씨처럼 그의 이력 뒤에 따라붙었다. 실제 반인륜 범죄에 활용된 것은 나치의 권위주의 건축이 아니라 나치정권이 볼셰비즘의 온상으로 지목해 폐교시킨 바우하우스의 합리주의 건축이었다. 기능에서 형태를 연역하려 한 이 극단적 이성주의자들의 미니멀리즘은 데이비드 하비의 말대로 아우슈비츠를 위시한 '살인공장'들에 영감을 제공했다.
    (중략) 동원된 민간 전문가들은 자기들의 작업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짐작하면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죄의식도 갖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은 이렇다. "폭력의 사용은 그 수단들이 목적에 대한 도덕적 평가로부터 분리될 때 가장 효율적이고 비용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분리는 나란히 진행되는 두 과정의 결과로서 나타나는데, 첫 번째 것은 꼼꼼한 기능적 분업이고, 둘째 것은 도덕적 책임성의 기술적 책임성으로의 대체다."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2008) (203쪽)

    - 유신체제는 "총화 단결"이란 구호가 물질화돼 작동하는 거대한 '반공 기계'였다. 이 시스템 안에서 주부는 살림하고, 학생은 공부하고, 노동자는 기계 돌리고, 예술가는 창작하고, 경찰은 범인 잡고, 판사는 판결했다. (204쪽)

  • 고속버스터미널(서울, 1978년) / 이강식
    #지역주의

  • 마포 도원빌딩(서울, 1988년) / 엄덕문
    #통일교 #문선명 #세종문화회관

  • 광화문 지하도(서울, 1966년) / 대림산업
    #노숙인 #김현옥 #지그문트바우만_소비사회

    - 노숙인들에게는 '소비 능력'이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하듯 고용(노동)이 성장의 함수가 되지 못하는 사회('고용 없는 성장' 사회)에서 사람들은 노동 능력보다는 소비 능력에 의해 그 쓸모가 가늠된다. 어떤 기술을 갖고 있느냐보다, 소득이 얼마인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판단된다는 얘기다. 바우만은 말한다. "빈곤층이 위반하는 규범은 고용의 규범이 아니라 소비 능력의 규범이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2008) 이 말에 따르면 노숙인은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이 아니다. (239쪽)

    - 문제는 추방이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식적 추방'으로 이어진다. 폭력을 동반하는 물리적 추방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추방된 자들의 존재를 한층 부각함으로써 예기찮게 '추방된 자들의 귀환'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권력은 추방된 자들을 인식의 장벽 바깥으로 몰아내는 데 한층 집요한 노력을 기울인다. 인식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들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일단 눈앞에서 사라지면 관심에서도 멀어진다. 관심에서 멀어지는 순간 도덕적 공감도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추방된 자들이 아무리 고통과 부당함을 호소해도 '헛소리'와 '소음'으로 취급될 뿐이다. (중략) 일상화된 배제와 추방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청소돼야 할 '쓰레기들'의 목록에는, 노숙인뿐 아니라 소비사회의 규준과 척도에 미달하는 불행한 개인 누구라도 기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244쪽) *** >> 이들을 인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것

  • 종묘공원(서울, 1985년) / 전두환정부
    #인정투쟁_악셀호네트

    -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ㅡ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 인의동 어버이연합 사무실을 찾는 것은 대체로 외롭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가난한 노인들이다. 이 '노인 투사'들은,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다."(<인정투쟁>, 1996)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말을 곱씹게 한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데, 이런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을 일러 '속물'이라 한다. 속물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과시와 협잡과 기만도 마다 않는다. 이런 행태의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만나면 '노추'가 된다. (252~253쪽)

  • 노을캠핑장

  • 청계천(서울,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