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8
나는 싸우는 사람으로 변했다. 공격 대상이 모호했다. 날마다 가슴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혼자 치르는 전투에서 나는 매일 전사했고 꿈처럼 깨어나 오늘을 살았다. 시가 무기였다. 둥그런 바가지 머리일 때부터 방바닥에 누워 주섬주섬 먹던 시. 이전처럼 한갓 유희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고달플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 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텔레비전은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채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 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 이영희의 소설 <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 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할 뿐이다.
사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 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히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 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인 것이다.
P.11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불가피했다. ...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끝도 없고 두서없는 물음의 연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혹서기도 혹한기도 에외 없이 캐리어 위에 방석 하나 깔고 앉아 깐 마늘을 파는 할머니의 다 닳아빠진 엄지손톱을 보면서 그의 삶을 가만히 헤아리는 일이다.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2014년 4월 16일보다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무언가와 싸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P.29
마르크스가 그랬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그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는다고. 자본주의가 개별 자본가의 선의와 악의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도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는 '어머니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았다. 능력이든 랜덤이든 운명이든 여성 일부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겠으나 전체로서 여성은 가부장 질서와 규범에 이미 속해있다는 얘기다.
P.35
모든 물음은 질문자의 입장과 욕망을 내포하는 법이다. 나의 물으음은 그간 얼마나 진화했는가. 남편의 시선만 간신히 모면한 듯하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P.44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P.65
"어머니가 해주신 밥"이라는 말은 완고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환원하는 가부장제의 언어다. 인습을 의심하고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문학의 본령을 거스르는 말이다.
P.81
세월이 흐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할 때 물었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무어라고 말해주면 가장 좋은지.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힘들었겠구나. 나한테 얘기해줘서 고마워."
진실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듣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할 권리(the right to speak)와 들릴 권리(the right to be heard)는 영어로 같은 표현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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