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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성장할 때. PGK 김영덕 피디와 방진혁 교육생을 만나다
가을비가 한옥 카페를 촉촉이 적신 9월 중순의 오후, 새로운 영화에 연출부로 참여하게 됐다는 방진혁 창의교육생이 일찍이 도착해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다. 그의 멘토 김영덕 피디는 아시아 최초로 충북 제천에서 열리는 세계영상위원회(AFCI) 총회 관련 일로 밤까지 새고 카페로 달려온 참이었다.
멘토 1명, 교육생 1명의 1:1 조합은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은 물론 창의인재 동반사업 전체에서도 유일하다. 한 멘토 당 최대 3명의 교육생을 받을 수 있어 대다수 멘토들은 두세 명의 교육생들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칭 ‘덕이와 혁이’ 커플의 관계는 이렇게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다.
‘책상 앞의 영화제작자’, 김영덕 피디
김 피디의 서글서글한 웃음은 더없이 푸근했지만, 자신을 ‘책상에 앉아있는 프로듀서’라고 소개할 때는 특유의 직업적 날카로움이 보였다.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더니, 그녀가 생각하는 ‘프로듀서의 역할’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김영덕(덕): 처음 영화 일을 시작할 때는 영화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어요. 영화는 모든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영화계에서 몇 년 지내고 보니까, 영화가 예술이면서 동시에 상품이고 산업이더라고요. 그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이어주는 게 프로듀서예요.
영화의 수명은 굉장히 길어요.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수년의 시간에서부터, 영화를 개봉하고, 해외에 판매하고, 몇 십 년이 지나서 그 감독의 회고전을 할 때까지……. 물론 영화 촬영이 제작의 ‘꽃’이고 그 중심에는 감독이 있지만, 한 영화가 태어나서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돌보는 사람은 프로듀서라고 생각해요.
김 피디는 10년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해외 마케팅, 외국영화 수입 및 배급, 영화 제작 등의 일을 해오며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다.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부, 제작부 일을 하다가 프로듀서가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김 피디처럼 여러 분야에 대한 이해를 통해 프로듀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김 피디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그녀가 현장을 누비기보다 책상 앞에 있기를 선택했는지 바로 수긍이 갔다.
덕: 현장을 책임지고 지휘하는 사람이 있듯이, 현장 뒤에서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과정을 조정하는 사람도 필요한 거예요. 워낙 모험이 큰 산업이다 보니까 저는 거기서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누가 너무 앞서 나가려고 하면 뒤에서 당겨주고, 정체돼 있으면 나아가라고 찔러주기도 하고요.
저예산 단편으로 단련된 감독, 방진혁 교육생
자신이 만든 만화나 이야기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재미있어 하는 모습에서 만족감을 느꼈던 소년. 어린 시절의 방진혁 교육생은 토니 스콧 감독의 <탑건>, <크림슨 타이드> 등을 보면서 막연히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에서 영상학을 전공한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단편 작품을 연출한 경험이 있다. 졸업 작품이었던 <지구과학>, 영화진흥위원회의 ‘2011 독립영화 제작지원작’으로 뽑힌 <스텔스 형제>를 비롯해, 실험적인 저예산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혁: 8만원만으로도 찍고, 아예 돈 안 들이고도 찍어 봤어요. 학생 때 친구들이랑 같이 산 카메라가 한 대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꽤 괜찮은 카메라였어요. 그걸로 충격적인 것들도 많이 찍었죠. (웃음)
예를 들면, 식탐 많은 여고생의 몸속에 사실 블랙홀이 있었으며, 그 블랙홀에서 지구를 구할 프로메테우스가 태어난다는 이야기(<지구과학>)라든가, 불량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소년이 악마에게서 스텔스 기술을 사 몸을 숨길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스텔스 형제>) 같은 것들이다.
방진혁(혁): 예술을 하겠다기보다는 재밌고 멋있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멋있게 만들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재밌게라도 하려고 C급, F급 영화들을 만들었죠. 결국은 그게 독이 됐다고 생각해요. 용감하긴 했지만, 작품성을 따지지 않고 쉽게, 빨리, 대충 만들어버리는 버릇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다시 처음부터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가지고 있던 꼼꼼함을 되찾으려 하고 있어요. <스텔스 형제>도 다시 편집하고 있고요.
학부를 졸업한 뒤 잠시 미디어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했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와 영상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색다른 경험을 쌓으려던 6개월 동안 오히려 ‘원래 하고 싶었던’ 영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던 것일까. “경치가 좋아서 학교가 좋다”는 방 교육생은 대학원을 마치고 창의인재 동반사업을 만났다. 늘 ‘학교 안’에 머물렀던 그에게는, 지금이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제법 잘 어울리는 만남, 그리고 성장
‘단 한 명의 교육생’을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김영덕 피디는 두 명을 선발했는데, 다른 한 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뒀다. 김 피디는 “내가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는데, 다시 객관적으로 다른 지원자들을 평가하기는 힘들지 않나”라며 충원없이 한 명의 교육생만을 받게 된 사연을 밝혔다.
혁: 처음엔 걱정도 됐어요. 혼자면 심심할 수도 있고, 꼭 가야하는 강의 스케줄 같은 것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멘토님과 친하신 PGK 김정영 피디님의 교육생 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문제없어요.
김영덕 피디는 방진혁 교육생의 연출작인 <스텔스 형제>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작으로 뽑혔을 때부터 그를 눈여겨봤다. 방진혁 교육생도 다양한 경력으로 발이 넓은 김 피디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주저 없이 그를 1지망 멘토로 지원했다. 김 피디는 방 교육생에게서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영화는 ‘희한’했고, 면접에서는 성실하고 재미있었다고.
그렇게 김영덕 피디의 유일한 제자가 된 방진혁 교육생은 ‘파견 근무’가 많아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우선, 곧 촬영에 들어가는 <고양이 장례식> 연출부 일로 현장에 나갈 예정이다. 또 매달 PGK에서 주최로 열리는 ‘2013 글로벌프로듀서랩’에서는 서기를 맡았다. 김영덕 피디가 다리를 놔줘 한 일인데, 영화 관계자들이 현직 프로듀서를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 보고 듣는 게 많다.
멘토 프로젝트로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SF 로맨스물 개발 작업이 진행 중이고, 교육생 개인 프로젝트로 단편, 장편 기획안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이번 사업 기간 내에 단편, 장편 연출작을 각각 한 편 이상 만드는 게 목표다. 김영덕 피디는 방진혁 교육생이 최근에 쓴 시나리오 초고를 두고, “방 감독이 어른이 됐다”며 웃었다.
덕: 방 감독이 이제까지 쓴 단편들은 대개 유년기나 학창 시절을 소재로 한 공상 과학물이었어요. ‘방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있었죠. 그런데 이번 시나리오에는 사회적인 시각도,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도 담겼더라고요. 진지하고 현실적인 작품도 방 감독에게 어울리겠다 싶어요.
김 피디는 방 교육생을 비롯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자신의 돈까지 들여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작에 뛰어든다는 점과, 만들어낸 영화에 대한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김 피디는 “방 감독도 이런 에너지들을 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태까지의 개인적인 단편 경험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말이다.
덕: 영화를 만들 때 시나리오 개발에 3년, 5년씩 걸리는 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기 때문이에요. 미지의 어떤 것, 이전까지 없었지만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죠. 많은 비용이 들고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에요. 방 감독도 그런 ‘장편을 만들 수 있는 내성’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김영덕 피디는 방진혁 교육생이 극복해야 할 점,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방 감독이 나에게서 나쁜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된다”고 했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해주는 ‘산업이란 게 이런 거다’, ‘그러면 위험하다’는 식의 충고가 방진혁 교육생의 창작 욕구를 해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인 것이다. 하지만 방 교육생의 생각은 달랐다.
혁: 김영덕 피디님이 해주시는 말씀에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여태까지는 감독으로서 재미있게 만드는 것만을 생각했다면, 이제는 영화라는 게 상품이고, 마케팅도 중요하다는 게 보여요. 영화 산업의 더 구체적인 것까지 이해가 넓어졌어요. 제가 연출에만 매몰돼 모르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김 피디님과 PGK 글로벌프로듀서랩을 들으면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맞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정말 매 시간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던 학창 시절의 꼼꼼한 성격, 독학으로 배운 수준급 일본어 실력, 10년 이상 기타를 쳐 왔다는 사실까지 같았다.
김 피디는 학창시절 취미로 혼자서 기타를 치다가, 최근 20여 년 만에 다시 멘토를 찾아 기타를 배우고 있다. 어렵고 소리가 잘 나지 않던 것도 멘토를 통하면 쉽게 됐다. ‘내가 왜 진작 멘토에게 배우지 않았나’ 싶었단다. 방 교육생도 기타를 치기 시작한 지 4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코드 잡는 법이 틀렸다는 걸 알고 처음부터 기타를 다시 배워야 했다. 두 사람은 기타와 관련된 경험에서 공통적으로 멘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김 피디는 “처음이어서 막연한 것들을 한 걸음에 뛰어넘을 수 있게, 옆에서 ‘별로 어렵지 않아’ 하고 손잡아 주는 사람”으로서의 멘토를 지향한다. 방 감독 역시 “선배로부터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닮은 점이 많은 ‘혁이와 덕이’ 커플은, 둘뿐이기에, 어느 멘토와 교육생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끈끈하게 뭉쳐가고 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소년에서 어른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
글 정주원 인턴기자 | 사진 유경선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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